새로운 질서, 예순한 번째 친구들을 기다려

구난후, 구난후장학재단 설립해

새로운 질서, 디스코드 서버 개설해

‘이븐’이라는 이름의 파시즘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단서를 달아두자. 흑백요리사의 심사 위원 안성재 셰프의 피드백은 ‘파인 다이닝’이라는, 극도의 완성도와 고객 만족을 지향하는 서비스업의 최전선에서는 반박하기 어려운 정답이다. 대가를 지불한 손님에게 요리사의 설익은 실험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 엄격한 잣대가 요리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창작, 특히 효율성 너머를 지향해야 할 예술의 영역에까지 무비판적으로 적용될 때 우리는 위태로워진다. 창작의 세계가 오직 매끄러운 상품을 만드는 일로만 축소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글은 안성재 셰프의 정답이 통하지 않는 (또는 통해서는 안 되는) 어떤 세계를 향한 옹호다.

꽃은 죄가 없다: 무용함을 옹호하며

“이 꽃은 대체, 왜 올렸습니까?” 안성재 셰프가 가차 없이 참가자를 탈락시킬 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효율성과 기능주의의 승리처럼 보인 까닭이다. 그 뒤 며칠 동안 나는 그를 본받아 평소보다 더 효율과 기능에 집중했다. 하지만 동시에 다시 한 번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과 창작이 언제부터 오직 기능만을 위해 복무했는가?

접시 위의 꽃은 요리사가 시스템(맛)의 효율성에 저항하며 남긴 마지막 잉여인 동시에 낭만이다. 모든 요소가 필연적 이유를 지녀야 한다는 주장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자본주의적 생산성에 기여해야 한다는 논리와 소름 끼치게 포개진다. 문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대개 줄거리에 크게 도움을 주지 않는 비효율적인 문장들이다. 코드의 주석에 남겨진 개발자의 농담은 기능하지 않지만 인간적이다.

안성재 셰프의 칼질은 완벽한 요리를 만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창작의 본질인 쓸모없음의 아름다움까지 잘라내지는 않았을까. 우리는 설령 그게 조화(造花)일지라도, 기능하지 않는 꽃을 더 심어야 한다. 그것만이 인공지능이 지배할 게 거의 분명해진 세상에서 인간 창작자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알리바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 꽃은 창작자의 안일함과 빈곤함을 가리기 위한 위장이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요리의 맛이 부족한 까닭에, 글의 내용이 부실한 까닭에, 디자인의 기획이 없는 까닭에 ‘허전함을 때우기 위해’ 올린 꽃은 낭만으로 포장되기 어렵다. 그 꽃이 없으면 그 접시가 설명되지 않을 때, 비로소 무용함은 예술이 된다.

‘이븐’한 세상의 공포

“익힘 정도가 이븐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자연스러운 상태, 즉 불균질함을 혐오하고, 인위적인 통제, 즉 균질함만을 선(善)으로 규정하는 강박을 상징하는 듯하다. 고기는 본디 부위마다 근육의 밀도가 다르다. 생각도, 글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단은 뜨겁게 타오르고, 어떤 문단은 차갑게 식어 있는 게 자연스럽다. 모든 부분을 균일하게 익히려는 시도는 결국 모든 개성을 말살하고 가장 무난하고 실패하지 않는 평균치로 수렴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웹 디자인과 콘텐츠가 지루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두 ‘이븐’한 상태, 즉 버그도 없고 파격도 없는 매끄러운 상태만을 지향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웹사이트를 포함해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작품은 우아함 속에 언제나 덜 익은 야생성이나 너무 익은 광기를 품고 있다. 나는 안성재 셰프의 완벽한 스테이크보다 누군가가 태운 빵 조각이 더 강렬한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불 조절에 실패해 태워버린 고기와 의도적으로 바삭하게 구워낸 고기는 다르다. 피카소의 그림이 해부학적으로 어긋난 것은 그가 인체를 정확하게 그릴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기본기가 없는 상태에서의 불균질함은 그저 미숙함이다. 안성재 세프가 요구하는 기술적 ‘이븐함’을 갖춘 뒤에야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파격이 실수가 아닌 스타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들의 혀를 믿지 말 것

“제 입에는 눅눅했습니다.” 이 한마디로 창작자의 의도는 묵살된다. 흑백요리사의 세계관에서 심사 위원, 즉 사용자는 신이다. 창작자는 오직 그 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창작은 수용자의 기호에 영합하는 서비스업이 아니다. 오히려 수용자의 기대를 배반하고, 그의 혀를 찌르고, 불쾌하게 만듦으로써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투쟁이다. 사용자가 불편하다, 이해하기 어렵다며 불평한다고 곧바로 사과하고 수정하는 태도는 창작보다 굴종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소설은 읽기 불편하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그림은 보기 어지럽다. 안성재 셰프의 기준이라면 그들은 모두 감점 또는 탈락이다. 창작자는 이따금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 입에 눅눅한 건 당신의 미각이 아직 제 의도를 이해할 만큼 진화하지 못한 까닭 아닐까요?” 단, 이 말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눅눅함’에 압도적인 맛이 필요하다. 대중을 불편하게 만들 작정이라면, 그 불편함마저 매혹적으로 느끼게 할 만큼의 필력이, 기획력이,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결함 있는 창작자, 하지만 탁월함을 갖춘

안성재 셰프의 피드백은 산업과 비즈니스의 영역에서는 정답일지 모른다. 그곳은 실수 없이 물건을 팔아야 하는 곳이니까.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를 기술자가 아니라 창작자라 생각한다면, 그의 말을 거역하는 편이 이롭다.

그러니 꽃을 올려보자. 쓸모가 없어도 아름답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븐하게 익히는 것도 피해보자. 에너지는 설익은 곳과 탄 곳의 낙차에서 발생한다. 먹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요리는 당신의 것이다.

적어도 새로운 질서에서만큼은 이 주장이 유효하기를 바란다. 이곳은 매끄러운 상품을 진열하는 쇼윈도가 아니라 덜 익은 생각과 재가 될 때까지 타버린 감정이 뒤섞이는 거친 주방이므로. 완벽한 기술자보다 결함을 인정하고 이용하는 창작자가 되는 편이 즐거울 수 있다. 적어도 새로운 질서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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