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검은색 티셔츠를 찾아서
이 글은 2021년 7월 12일 『VISLA』에 실렸다. 이 글을 통해 처음 만난 『VISLA』 에디터 한지은은 몇 달 뒤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서」의 친구가 됐고, 몇 달 뒤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대학원에서 교수와 학생으로 다소 어색하게 다시 만났다.
가만히 있어도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즈음이면 내가 어김없이 수행하는 일이 있다. 우선 냉장고 냉장칸에 수박을 보관할 자리를 마련한다. 적어도 열 통의 잘 익은 수박이 이곳을 거쳐 갈 예정이다. 그 뒤 자주 여닫는 옷장으로 반바지를 옮겨놓고, 신발장 밖으로 샌들을 꺼내놓는다. 마지막으로 아파트 의류 수거함에 더는 입을 수 없을 만큼 해진 티셔츠를 집어넣고, 떠나보낸 수만큼 티셔츠를 주문한다. 주문은 터치 몇 번만으로 이뤄지지만 임하는 마음만큼은 과정마다 퍽 경건하다. 30초가 채 지나지 않아 결제가 완료됐다는 안내문을 마주하는 순간 마음은 어딘가 안전한 자리에 놓인다. 물론 에어컨 필터를 청소하거나 옆머리 길이를 6밀리미터 이하로 정돈하는 등 자잘한 일이 남았지만, 이쯤이면 여름을 맞이할 굵직한 준비는 얼추 끝난 셈이다.
주문하는 티셔츠는 한결같다. 로고에서부터 “우리는 품질에 자신 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일본의 의류 제조 회사 프린트스타의 면 100퍼센트 17수 티셔츠로, 가격은 장당 평균 5,000원 정도고, 마음만 먹으면 4,000원대로도 구입할 수 있다. 이 티셔츠를 처음 소개받은 것은 몇 년 전, 지금은 문을 닫은 전설적인 갤러리 아카이브 봄에서 내가 운영하는 회사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소개하는 행사 『레인보 셔벗』을 마련하면서였다. 역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즈음이었다. 이제껏 적지 않은 티셔츠를 입어봤음에도 품질과 가격, 무엇보다 취향을 만족시키는 면에서 이보다 내게 알맞은 티셔츠는 마주한 적이 없다.
물론 앞으로 내가 입어볼 티셔츠는 무궁무진하겠지만, 웹 브라우저에서 HTML의 본문 글자 크기에 기본값으로 지정된 16픽셀처럼 내게 티셔츠의 기본값은 이미 지정됐다. 뉴욕에 머물 때 선물받은 인터넷 아카이브 캡, 이제는 구하기 어려운 칼하트 WIP 데님 디트로이트 재킷, 칼라 언저리와 팔꿈치 부분이 튿어지기 시작하는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초록색 체크무늬 셔츠, 그라미치 반바지, 폴로 랄프 로렌 치노 팬츠, A.P.C. 데님, 파라부트 샴보드, 그 안에 신는 흰색 면 양말까지, 티셔츠는 거의 매일 내 피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며 기본값으로서, 다양하지는 않지만, 상황에 따라 함께 착용할 아이템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thisisneverthat의 박인욱 대표님이 선물로 건넨 뉴 밸런스 992를(사이즈가 한 치수 컸음에도) 주저 없이 받은 것도 티셔츠와 어우러진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까닭이다.
티셔츠는 깨끗하게 검고, 검게 깨끗하다. 1800년대 말 영국 해군의 속옷에서 비롯했다는 티셔츠는 오늘날 광고판으로까지 기능하지만, 로고뿐 아니라 문구 하나 없는 티셔츠를 입는 동안 나는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 즉, 어떤 브랜드도 나를 움직이는 광고판으로 삼을 수 없다. (물론 내게도 움직일 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 말까지 하는 광고판으로 기꺼이 자처하고 싶은 브랜드가 있지만, 해당 브랜드에서는 정식으로 티셔츠를 출시하지 않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가장 친한 미국인 친구 로럴이 내게 물은 적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색이 뭐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초록색이지만, 티셔츠에서만큼은 검은색이 기본값이다. 내가 읽거나, 쓰거나, 번역하거나, 만든 책에서 종이, 즉 배경은 대개 희고, 글자는 대개 검은 까닭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발표한 열세 번째 ‘시청각 문서’ 「회사 소개」에서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웹사이트인 최초의 웹사이트나 이 글을 쓰는 iA 라이터에서도 그렇다. 이 글이 실릴 매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도스, 유닉스, 리눅스 같은 커맨드 라인 인터페이스에서 글자는 대개 희고, 배경은 대개 검은 까닭이다. 웹사이트나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는, 내가 사랑하는 워드프로세서인 서브라임 텍스트에서도 마찬가지다. 박상순 선생님이 디자인한 보르헤스 전집 표지에서도 그렇다. 인류가 처음 미술에 사용했다는 색인 검은색은 목적에 따라 극적이고 효율적으로 국면을 지배하거나 배경으로 물러난다. 이는 ‘패션’이라는 미술에서도 다르지 않다.
티셔츠는 적당히 무겁고, 그만큼 적당히 두껍다. 바람이 불어도 쉽게 날리지 않고, 그래서 무엇보다 몸에 밀착되지 않는다는 점은 특히 몸매가 빼어나지 않은 나 같은 사람에게 위안이 된다. 한껏 포식한 뒤 부풀어 오른 배는 물론이고, 유두, 나아가 유륜 같은 남에게는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각인시키고 싶지 않은 신체 부위도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보다 가볍고 얇으면 조금 더 움직이기 편하고 공기가 잘 통하겠지만, 어떤 장점을 포기하면 또 다른 장점이 따라오는 법이다. 게다가 티셔츠의 무게와 두께 앞에서 나는 어린 시절에 느낀 엄마의 사랑을 되새길 수 있다. 한여름 밤 잠든 내가 이불을 걷어내기라도 하면 내 방에 들른 엄마는 이불을 다시 끌어오며 이렇게 속삭이곤 하셨다. “명심하렴.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배는 따뜻해야 한단다.”
주문한 티셔츠가 우리 집 현관 앞에 도착하는 것은 길어야 하루 또는 이틀, 짧게는 단 몇 시간 만이다. 서둘러 포장을 풀어 헤친 뒤 곧장 세탁과 건조까지 마치면, 내가 방금 입은 티셔츠는 어제 떠나보낸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인터넷에 연결되는 순간, 드롭박스에 저장해둔 파일이 새 운영 체제를 설치한 컴퓨터에 자동으로 동기화되듯 티셔츠를 둘러싼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마저 그대로다. 많은 일에서 내게 익숙함은 새로움에 앞선다. 새롭지만 동시에 전혀 새롭지 않은 티셔츠를 입는 일은, 나아가 그 티셔츠를 입고 집 밖을 나서는 일은 내가 매일 마시는 커피만큼 그윽하고, 일본의 버블 시기를 빛낸 코카-콜라만큼 짜릿하다. 게다가 두 음료 또한 티셔츠처럼 아름답게 검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티셔츠는 다름 아닌 검은색인 까닭에 몇 가지 단점이 있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단점이란 것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검은색이 완전함을 상징한다지만, 사소함은 이따금 완전함을 흔든다. 빛을 흡수한다고 알려진 검은색은 자연스럽게 흡수한 빛만큼 열을 저장하고 주위로 발산한다. 초등학교에서 배운 과학 상식은 겨울에는 흐뭇하지만, 여름에는 불쾌하기만 하다. 2011년 여름 f(x)가 발표한 「핫 서머」에서 루나는 노래했다. “너무 더우면 까만 긴 옷 입자.” 루나는 군무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미소지었지만, 미소에서는 당혹스러움이 풍겼다. 자신이 읊는 노랫말이 습도가 높은 서울의 여름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지했을 테니 말이다. 여름마다 검은색 티셔츠로 루나의 제안을 실천하는 나는 마조히스트로 평가받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검은색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검게 변했을 내 두 폐를 연상시키는 한편, 특히 밤일수록 예기치 못한 인명 사고를 유발하기 쉽다. 어느 날 밤 운동 삼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인적이 드문 홍제천변을 달리다 연희동 근처에서 마주 달려오는 사람과 부딪힐 뻔한 적이 있다. “괜찮으세요?” 물론 괜찮을 리 없었다. 정신을 차린 뒤 바라본 그는 나처럼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채였다. 누구 하나 피하지 않았더라면 어느 한 사람은 홍제천에 빠져 젖은 몸으로 집까지 걸어가야 했을 테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위험한 동물인 ‘조조’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 뒤에는 입술뿐 아니라 티셔츠에 사랑의 흔적이 남지 않았는지, 즉 조조의 털이 붙지는 않았는지 세심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세탁기 속에서 티셔츠들이 엉켜 돌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면, 블랙홀이 생성되는 듯한 느낌에 세계의 멸망이 중국 우한이 아닌 우리 집 세탁기 속에서 시작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2018년 세상을 떠난 스티븐 호킹 박사가 남긴 “세탁기 속에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블랙홀이 있고, 이따금 그 속으로 양말이 한 짝씩 빨려들어간다.”라는 말은 시답잖은 농담이 아닐지 모른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식어갈 즈음이면 자주 여닫는 옷장으로 옮겨놓는 회색 스웨트셔츠나 흰색 옥스퍼드 셔츠와 함께 입기 어렵다는 점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살색 목과 쇄골을 가린 회색 스웨트셔츠 사이로 드러난 약 1센티미터 두께의 티셔츠 시보리가 지나치게 도드라지는 탓에 얼핏 옹색해 보이고, 그저 새로운 질서를 부여했을 뿐인데, 흰색 셔츠 속 검은색 티셔츠가 조금이라도 비치기라도 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무언가를 들킨 듯하다.
비극적이지만, 앞서 나열한 검은색 티셔츠가 지닌 몇 가지 단점을 해결한 티셔츠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패션계에 종사하는 한 친구는 내가 털어놓은 고민을 듣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그런 완벽한 검은색 티셔츠가 있을까?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걸 이루려는 태도 같지 않아? 차라리 다른 색은 어때? 검은색 말고도 색은 많잖아. 예컨대…” 뒷말을 들어볼 필요도 없이 친구의 말은 사실이다. 아니, 사실일지 모른다. 나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편집’에 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는 ‘편집’을 창작을 포함한 (또는 창작과는 차원이 조금 다른) 행위로 간주하는 편입니다. (…) 제가 처음 접한 편집은 어떤 공고한 틀을 그 안팎에서 지배해 국면을 제어하는 행위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고요.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편집이 폭력적인 행위일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 모든 것을 완벽하게 편집할 수 없다는 불완전함이 편집이라는 행위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불완전할 수 있음을 인식한 채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은 도전해볼 일이다. 그리고 그 도전 또한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채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