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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질서, 디스코드 서버 개설해

매체 연대기: 소리에서 비트, 그리고 지능으로

3만 년 전 동굴 벽에 소 피로 그림을 그리던 시절부터 인공지능과 농담을 나누는 오늘날까지, 인류의 역사를 요약하면 정보를 담는 ‘그릇’을 바꾸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여정이었다. 이는 인간이 시공간이라는 감옥을 탈출해온 찬란한 여정인 동시에, 그 대가로 우리의 주체성을 기계에 외주 준 잔혹한 서사시이기도 하다.

육체에 갇힌 정보: 동기화의 지옥

인류 최초의 프론트엔드 인터페이스는 인간의 ‘몸’이었다. 기록 수단이 없던 시절, 정보는 목소리와 제스처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지극히 동기적인 매체였다.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려면 반드시 그 사람과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숨을 쉬고 있어야 했다는 뜻이다. 당시 정보는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휘발성 데이터였다. 인류는 이 데이터 손실을 막기 위해 뇌라는 불안정한 하드드라이브에 최적화된 ‘데이터 압축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그것이 바로 운율과 리듬이다. 고대 서사시가 노래처럼 불린 이유는 예술적 감수성 때문이이라기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까먹었기 때문이다. 암기하지 못하는 자는 지식을 소유할 수 없었고, 지식이 없는 자는 굶어 죽기 딱 좋은 시대였다.

진흙판 해킹: 설형문자와 영수증의 영생

기원전 3,5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은 매체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하드웨어 혁명을 일으킨다. 바로 설형문자다. 갈대 끝을 뾰족하게 깎은 뒤 젖은 진흙판에 찍어 누르던 쐐기 모양의 기호는 정보가 인간의 육신을 떠나 영생을 얻은 첫 번째 사건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인류 최초의 문자가 서사시가 아니라 ‘누가 누구에게 보리 몇 가마를 빌렸는가’를 기록한 영수증이었다는 사실이다. 지식의 보존보다 앞선 것은 ‘채무의 박제’였다. 수백 년 전 죽은 빚쟁이가 새겨놓은 청구서가 진흙판 위에서 여전히 나를 노려보는 비동기 소통의 공포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진흙판은 무거웠고 한 번 굳으면 수정이 불가능했기에, 당시의 정보는 오늘날의 블록체인만큼 완고하고 물리적이었다.

탐색 UI의 혁명: 두루마리에서 코덱스로

매체는 점차 가벼워졌다. 파피루스와 양피지가 등장하면서 정보는 비로소 휴대성을 지니게 됐다. 초기 형태는 두루마리(Scroll)였다. 정보를 선형적으로 담는 이 매체는 지극히 공급자 중심적이었다. 중간 내용을 보려면 앞부분을 물리적으로 다 거쳐야 했다. 원하는 장면을 찾기 위해 비디오테이프를 앞뒤로 빨리 감던 고통의 원조라 할 만하다. 그러다 1세기경, 인류는 매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디자인 혁신인 코덱스(Codex)를 발명한다. 종이를 낱장으로 묶어 한쪽을 고정하고 덮개를 씌운, 우리가 아는 ‘책’의 형태다. 코덱스는 매체에 ‘무작위 접근’(Random Access) 기능을 부여했고, 이제 독자는 쪽 번호를 보고 원하는 곳을 즉시 펼칠 수 있게 됐다. 두루마리의 선형적 독재가 무너지고, 정보의 탐색 주권이 독자에게 넘어온 순간이다. 이 효율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무려 2,000년을 지배하게 된다.

인쇄술과 종이: 지식의 융단폭격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코덱스라는 하드웨어에 대량 복제라는 소프트웨어를 탑재한 사건이다. 여기에 식물성 섬유로 만든 저렴한 ‘종이’가 연료로 투입되자 지식은 폭발적으로 확산했다. 필사가가 평생을 바쳐 베껴 쓰던 성경이 공장에서 찍혀 나오자 신의 권위는 땅으로 떨어졌고, 대중의 머리는 굵어졌다. 하지만 표준화된 텍스트는 인류의 암기력을 퇴화시켰다. 책이 흔해지자 인류는 더 이상 기억하려 애쓰지 않게 됐다. 뇌의 일부를 종이에 외주 준 셈이다. 이때부터 인간은 아는 것이 없어도 아는 척하기 좋은 도구를 갖게 됐고, 도서관이라는 거대한 공유 서버에 정보를 인덱싱하며 지식의 제국을 건설했다.

현실의 복제와 감각의 거세: 사진에서 TV까지

19세기, 인류는 문자의 추상성을 넘어 현실 그 자체를 박제하고 싶어 했다. 사진은 빛을 물질 위에 고착시켰고, 영화는 그 빛에 시간을 부여했다. 이제 매체는 해석을 요구하는 텍스트의 시대를 지나 목격을 강요하는 이미지의 시대로 진입했다. 20세기 중반의 라디오와 TV는 일대다 브로드캐스팅이라는 기괴한 구조를 완성했다. 매체는 거실 한복판을 점령하고 수백만 명에게 동일한 화면과 소리를 주입했다. 정보는 이제 논리보다 감각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사람들은 화면 속 연예인의 불륜에 분노하면서 정작 자기 옆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궁금해하지 않게 됐다. 매체는 강력해졌지만, 사용자의 주체성은 거세당했다. 우리는 그저 채널을 돌릴 권력만 가진 수동적인 수신기에 불과했다.

다시 시작된 두루마리: 디지털 스크롤의 역설

디지털 시대가 열리자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코덱스의 시대가 가고 다시 또 다른 두루마리, 즉 스크롤(Scroll)의 시대가 돌아온 것이다. 우리는 스마트폰 화면을 끝없이 아래로 내리며 정보를 소비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파피루스를 말아 올리던 동작의 부활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스크롤은 과거보다 훨씬 정교하고 교활하다.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멈추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콘텐츠를 아래에서 밀어 올리는 무한 스크롤을 완성했다. 코덱스가 선사한 선택의 자유는 사라지고, 이제 알고리즘이 우리 대신 정보를 편집하고 배열한다. 우리가 정보를 고르는 게 아니라, 기계가 우리에게 정보를 골라주는 수동적 매체의 시대가 온 것이다. 매체가 진화한 만큼 사용자의 선택권은 퇴행했다.

스스로 사고하는 매체: 생성형 AI와 BCI

오늘날 우리는 매체가 단순한 그릇을 넘어 스스로 정보를 생성하고 해석하는 에이전트가 되는 시점에 서 있다. 가장 최첨단 기술인 AI가 인류 최초의 매체인 ‘말(대화)’의 형식을 빌려 돌아온 것은 상징적이다. 수만 년을 돌아 결국 우리는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대화 상대는 옆집 이웃이 아니라 차가운 서버실의 실리콘 지능이다. 미래의 매체는 언어라는 필터조차 제거하려 든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는 생각하는 즉시 데이터가 전송되는 시대를 예고한다. 매체가 마침내 인간의 두개골 안으로 침투할 때, 우리는 ‘나의 생각’과 ‘기계의 주입’을 구분할 수 있을까? 뇌에 직접 광고가 꽂히는 날, 우리는 그것이 나의 욕망인지 서버의 명령인지 알지 못한 채 결제 버튼을 누르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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