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8
어느 날 강이룬 선배가 물었다.
구홍 씨, 안녕하세요? 언제 특강 한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는 웬만하면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 하지만 특강 시작 시각이 한국 시간으로 새벽 4시였음을 미리 알았더라면 한 번쯤 고민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한국 시간대로 2022년 10월 14일, 미국 파슨스 스쿨 오브 디자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특강이 열렸다. 주제는 글쓰기와 웹을 기반으로 펼쳐온 내 작품 세계였지만, 시간대가 시간대였던 만큼 이야기는 잠에서 시작할수밖에 없었다.
일에 여덟 시간, 생활에 여덟 시간, 잠에 여덟 시간. 이는 공평한 공식이다. 어제 밤을 새웠다는 건 명예의 훈장이 아니라 무능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꼴이다.
내가 좋아하는, 심지어 존경하는 37시그널스(37signals)의 웹사이트1의 에는 회사 안팎으로 보내는 서른일곱 가지 신호가 정리돼 있다. 그중 여덟 번째 「8/8/8」은 현대인의 시간 분배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일에 여덟 시간, 생활에 여덟 시간, 잠에 여덟 시간. ‘워라밸’을 위시한 일과 생활의 균형만이 아니라 잠까지 포함한 삶 전체의 균형을 고려하자는 주장이다.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잠을 작은 죽음으로 여겼다. 반면, 서양 근대 철학은 잠을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상태로 간주하며 경계했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은 오히려 잠을 통해 뇌가 정보를 정리하고 새로운 연결고리를 형성하며, 창의성을 촉진한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잠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작업 도구가 된다. 밤새도록 붙잡고 있던 코드의 오류나 디자인의 막힌 부분이 다음 날 아침 샤워 중에 문득 해결되는 경험. 이는 우연이 아니다. 잠이라는 시간이 수많은 정보의 파편을 재조한 결과다.
「8/8/8」은 일과 생활, 그리고 잠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음을 강조한다. 특히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기기는 수면 패턴을 교란하고, 화면이 뿜는 청색광은 수면을 유도하는 멜라토닌(Melatonin) 분비를 억제한다. 끊임없는 알림은 우리의 주의를 뺏는다. 이때 「8/8/8」은, 적어도 내게는, 시간 분배 공식을 넘어 삶을 위한 실용적 제안으로 자리 잡는다.
2022년 10월 14일 새벽 6시, 성공적으로 특강을 마친 뒤 나는 37시그널스의 여덟 번째 신호가 단순한 구호가 아님을 깨달았다. 하루는 아침이 아니라 전날 밤의 충분히 만끽한 잠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 곧 책을 덮고 잘 시간이 다가온다. 불과 몇 시간 전처럼 잠시 죽음을 경험할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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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미국 시카고에서 웹 디자인 회사로 출발했지만, 2004년 ‘베이스캠프’(Basecamp)라는 프로젝트 관리 도구를 만든 뒤 본업을 아예 바꿔버린 특이한 회사다. 이들은 업무량을 줄이기 위해 도구를 만들었고, 그 도구 덕에 오히려 일이 더 많아졌지만, 역설적으로 이를 다시 정리하기 위해 『다시 일하기』(Rework), 『원격 근무』(Remote), 『미쳐야 일 잘하는 줄 알았어요』(It Doesn’t Have to Be Crazy at Work) 등의 책을 출간했다. 사무실에서 대면 회의를 거의 없애고, 주 32시간 근무제를 실험하며, 회사명을 ‘베이스캠프’로 바꿨다가 2023년에는 원래 이름으로 되돌아갔다. 어쩌면 이들은 일하는 척하면서 어떻게든 ‘일 안 하기’를 정당화하는 최고의 전략가들일지 모른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본받고 싶은 회사로 꼽는 데는 까닭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