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가 문제적인 까닭은?
모든 창작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행위는 언제나 ‘소개’다. 하지만 소개는 단순히 자신을 알리는 행위가 아니다. 자신을 구성하는 항목들을 선택하고 배열해 세상에 내놓는,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목록 작성 행위다.
2015년 늦가을에 설립해 안그라픽스와 워크룸을 거쳐 안그라픽스 랩(약칭 및 통칭 ‘AG 랩’)에 기생하며 내가 근근이 운영해온 1인 회사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다음과 같이 회사의 주된 목표를 소개해왔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여러 방식으로 회사, 즉 민구홍 매뉴팩처링 자체를 소개하는 데 주력합니다.
이는 회사의 첫 번째 제품이 열세 번째 ‘시청각 문서’로서 회사에서 수행하지 않는 일 서른일곱 가지를 소개한 「회사 소개」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부정(否定)의 목록’이라는 지배 논리를 통해 회사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시도였다.
(…) 않습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거리에 버려진 농구공의 궤적을 추적하지 않습니다. (…)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사보에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의 정렬 기능으로 작성한 서정시를 연재하지 않습니다. (…)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보도 자료에 야스미나 레자와 공자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
어떤 대상을 주위에 알려 다른 대상과 연결하는 ‘소개’, 즉 자신만의 목록을 제시하는 행위는 분야를 떠나 반드시 필요한 행위이자 절차다. 거칠게 말해 소개를 거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떤 이야기도 시작하지 않는다. 소개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키는 의식이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를 빌리면, 소개를 통해 우리는 세계 속에서 자리 잡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규정한다. 소개가 문제적인 까닭이다.
소개에 비즈니스를 더하면 홍보와 마케팅에서 판매로, 소개에 예술을 더하면 창작에서 출판, 전시, 공연으로, 소개에 사랑을 더하면 구애에서 연애로 이어진다. 이렇듯 소개는 크기가 크든 작든, 범위가 넓든 좁든, 모든 일에 자리한다. 소개가 문제적인 까닭이다.
모든 생산 활동의 기저, 즉 맨 밑바닥에는 순전한 쾌락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고민을, 솜씨를, 성과를, 나아가 생산 주체, 즉 자신을 소개하고 싶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욕망이 자리한다. 이 욕망 앞에서 모노하(物派) 운동의 선구자 이우환 선생, 느닷없이 우리 곁을 떠난 오프화이트™(Off-White™)의 설립자 버질 아블로(Virgil Abloh), 우리 집 근처 마포구평생학습관에서 시화전을 연 동아리 회원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뿐일까? 시인, 소설가, 번역가, 편집자,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기자, 마케터, 매주 금요일 밤 재즈 바에서 연주에 심취한 음악가까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떤 대상을, 나아가 자신을 소개하는 셈이다. 이들의 욕망에 크고 작은 사이에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야심, 즉 얼마나 소개할지와 취향, 즉 어떻게 소개할지다.
약력
얼마간의 성공과 얼마간의 실패를 거치며 이제껏 내가 생활해온 궤적, 즉 내 역사를 한두 문단으로 정리한 약력은 나를 소개하는 가장 단순한 도구다. 대개 글자만으로 이뤄진 만큼 실용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동시에 시간이라는 명확한 지배 논리를 따르는 연대기적 목록이기도 하다. 약력은 결과적으로 나를 위한 도구지만, 남이 마주해 읽는 동안 온전히 작동한다. 따라서 약력은 타인의 눈을 통해 작동하는 사회적 도구이기도 하다.
느닷없이 내 곁을 떠난 친구 김승연처럼 평소 읽기를 두려워하거나 문해력이 궁색하지 않다면 누군가는 약력만으로 나를 인식하고, 오해하고, 나아가 나를 과연 자신의 추억 속에 놓을 만한지 판단한다. 무시할 수 없는 이런 중요성 덕에 저술하거나 번역한 원고를 책으로 출간할 때, 공들인 작품을 전시할 때, 잡지에 에세이를 기고할 때, 어디든 약력을 위한 귀중한 자리가 마련돼 있다.
나는 스물여덟 살, 결혼을 1년여 앞둔 2013년 12월 6일, 프레시안 북스에 「친애하는 독자께」를 발표하며 처음 약력을 선보인 이래 기회가 마련될 때마다, 즉 나를 소개해야 할 때마다 처음 쓴 약력을 한두 구절씩 갱신해왔다. 그리고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설립한 2015년 무렵 느닷없이 그 과정을 웹사이트를 통해 정리하고 소개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3월 5일.’에서 시작해 ‘(웃음)’으로 마무리되는 이 웹사이트의 제목은 「참고로 민구홍은…」이다.
이 웹사이트는 그 자체로 내 약력의 변천사다. 1초 간격으로 반짝이는 “그리고…”를 탭하거나 클릭할 때마다 약력은 갱신되고, 오른쪽에는 갱신된 정보와 관련한 추가 정보가 드러난다. 예컨대 내 생일인 ‘3월 5일’은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의 철학자 장 그르니에가 세상을 떠난 날, 내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조선일보』가 창간된 날, 더 북 소사이어티가 처음 문을 연 날, 그리고 물고기자리에 관한 정보로 이어진다. “마음이 여리고 눈물이 많아 사람들이 그냥 툭 내뱉은 말에도 쉽게 상처를 받거나 눈물을 흘린다고 하니 주변에 물고기자리 친구들이 있다면 이런 면을 잘 살펴주면 좋겠네요.” 이 웹사이트는 소개의 형식을 재해석해 개인의 약력이 어떻게 더 큰 맥락과 연결되는지 소개한다.

그리고 2022년부터 느닷없이 인스타그램(@minguhong.fyi) 스토리를 통해 이따금 까닭을 따지기 시작했다. 일상에서 마주한 사진과 함께 까닭을 따지는 이 시리즈의 제목은 「(참고로 민구홍이) …까닭은?」이다. 이는 일상의 기록을 넘어 나의 취향과 가치관,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드러내는 또 다른 소개다. 생각날 때마다 드문드문 수행했음에도 어느덧 아이폰 15 프로 판형의 책 한 권 분량이 쌓인 까닭이 궁금할 따름이다.

그리고 2024년부터 느닷없이 글자만으로 이뤄진 네 컷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없이 오직 언어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 작업은 소개의 본질, 즉 언어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또 다른 소개로, 네 컷이라는 구조만으로도 자신의 생각을 소개할 수 있음을 소개한다.
앞선 세 가지 방식의 소개는 모두 소개의 본질을 탐구하고 확장하려는 시도이자 그 자체로 그 시도를 소개한다. 소개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선언하는 행위이며, 자신만의 목록을 어떻게 구성하고 제시하는지에 따라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진다. 소개가 문제적인 까닭이다.
(다시) 약력
그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일민미술관 선임 큐레이터 윤율리는 나와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민구홍과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작업을 이루는 요체는 언어나 웹사이트 따위가 아닌 ‘소개’라는 개념 그 자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동안 나와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움직인 동력은 순전히 약력을 한 구절씩 편집하고 업데이트해가는 즐거움, 즉 나와 회사의 생각을, 고민을, 솜씨를, 성과를, 나아가 나와 회사를 소개하고 싶은, 그래서 결국 어떤 대상과 연결되고 싶은 욕망이었는지 모른다. (나아가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순진하리만큼 이 욕망에 충실하려 한다. 단지 회사로서 조금 더 의식하고 양식화해 드러낼 뿐이다.) 소개를 향한 집착은 개인적인 작업을 넘어 타인과의 관계, 나아가 다음 세대에게 말을 거는 방식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소개가 문제적인 까닭이다.
2022년 1월, 나는 미국에 있었다. 2016년부터 7년여 동안 일한 워크룸에서 AG 랩으로 직장을 옮길 무렵이었다. 프린스턴 대학교 그래픽 디자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아이퍼링크에 관한 강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오랜 친구 로럴 슐스트와 함께 뉴욕에서 자동차로 네 시간 떨어진 코네티컷 숲 속의 오두막에서 단 둘이 휴가를 즐기던 참이었다. 막 잠에서 깨 눈 덮인 숲속을 산책하고 돌아온 즈음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의 덕기에게 이메일이 와 있었다.
구홍,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졸업식이 열리는데, 축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런데 내일이에요!
본디 덕기는 실시간 방송을 부탁했지만, 한국과 시차를 맞추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인터넷 환경까지 좋지 않았던 탓에 급한 대로 로럴의 도움을 받아 영상을 녹화해 전송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에 쫒기느라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셔츠 팔꿈치 부분은 다 튿어져 살이 드러난 채였다. 어쨌든 시간에 맞게 전송된 영상은 졸업식이 열린 명필름 랩에서 대형 스크린에 상영됐다. 「새로운 질서」 덕에 6주마다 마주할 수밖에 없는 면구스러운 영상에서 나는 끊임없이 이렇게 말한다.
안녕하세요.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에서 「새로운 질서」를 진행하는 민구홍입니다. 여러분의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 앞으로 자신이 어떤 대상을 연결할 수 있을지, 또는 어떤 대상과 연결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학교, 동료, 또 다른 무엇… 자신이 다른 대상과 연결되는 순간, 또는 연결됐다고 믿는 순간,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의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소개는 작게는 자기 표현일 뿐 아니라 크게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재정의하고 재배치하는 일이다. 소개를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이야기는 저마다 삼각형을 만든다. 그 꼭지점은 요컨대 앞으로 함께할 사람, 자랑할 만한 경력, 그리고 얼마간의 돈이다. 물론 이 삼각형이 완벽한 정삼각형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게 소개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소개가 문제적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