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독자께
처음 의뢰를 받아 쓴 글로 2013년 12월 6일 프레시안 북스에 실렸다. 이 글 덕에 내 첫 번째 약력을 쓸 수 있었고, 무엇보다 김형진, 박활성, 이경수, 즉 내가 편하게 ‘선배’라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들을 만났다.
독자께서는 얀 치홀트(Jan Tschichold)를 아시는지요? (편지글 첫머리를 이런 질문으로 시작하는 점을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편집 디자이너, 편집 디자인을 가르치거나 공부하는 이, 또는 편집 디자인에 관심 있는 이에게는 익숙하겠지만, 독자께서는 아마 조금 낯설게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얀 치홀트는 다름 아닌 사람의 이름입니다. 독일 출신 스위스인 얀 치홀트는 타이포그래퍼이자 책 디자이너였고, 선생이자 저술가, 이론가였습니니다. 여기서 ‘타이포그래퍼’는 거칠게 말해 글자를 만들고, 선택하고, 배치하는 타이포그래피를 다루는 전문가를 말합니다. 그가 슬라브족 혈통이고, 얀 치홀트가 요하네스 치홀트, 이반 치홀트를 거쳐 정착된 이름이라는 점, 게다가 그의 성인 Tschichold의 철자가 처음에는 Tzschichhold였다는 점까지 굳이 설명해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얀 치홀트는 1902년 인쇄 산업의 중심지였던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간판 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주변 환경 덕에 그는 아버지를 따라 글자를 그리며 자연스럽게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을 두게 됐습니다. 1923년 그는 독일의 건축·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Bauhaus)에서 열린 전시회를 관람한 뒤 새로운 예술 사조인 구성주의에 눈을 뜹니다. 당시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음악, 미스 반데어로에(Mies van der Rohe)의 건축 등 새롭게 등장한 크고 작은 문화적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태도의 표현으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가 필요하다고 느낀 거죠.
그는 라슬로 모호이너지(László Moholy-Nagy), 엘 리시츠키(El Lissitzky) 등의 예술가와 교유하고 때로는 거리를 두며 자신의 이론을 정리한 끝에 1928년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로 소개합니다. 그가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로 실천하고자 한 것은 이전의 관습과 개인적인 표현 지양, 내용에 따른 시각 형태, 현대적인 기술 활용 등을 통한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이었습니다.
얀 치홀트는 “타이포그래피는 그래픽 프로세스의 영역에서 의사 전달을 위한 정밀한 그래픽 형태다.”로 시작하는 새로운 타이포그래피 선언문을 통해 분별없이 사용된 글자체와 글자 정렬, 장식적인 시각 요소 등 기존의 타이포그래피 관습과 단절합니다.
여전히 낡은 것 안에서 새로운 삶을 숨 쉬려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과거는 이미 죽었다. —39쪽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는 발표된 뒤 유럽을 비롯해 미국에까지 급격히 확대됩니다.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는 구성주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이 향한 쪽은 예술가 등 제한된 소수가 아닌 식자공이나 인쇄공 등 타이포그래피 현장이었으니까요.
얀 치홀트는 1933년 나치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이주합니다. 나치가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를 공산주의를 배경으로 한 문화적 볼셰비즘으로 낙인찍은 탓이죠. 주변 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저술과 문학 위주의 책 디자인에 몰두하며 그는 자신이 비판한 이전 타이포그래피 관습 가운데 세리프체 사용, 가운데 정렬 등을 수용하며 그동안 주장해오던 이론을 일부 변경합니다.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에서 나치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 출간된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의 뼈대는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와 비슷하지만, 그럼에도 금욕적이고 한편으로 교조적이기까지 했던 그의 생각이 완화됐음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 뒤 얀 치홀트는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스위스와, 얼마간은 영국에 머물며 스위스 제약 회사 호프만 라 로슈의 아트 디렉터로 일하고, 독일 출판사 비르크호이저의 책을 디자인하는 등 타이포그래피 작업과 저술 활동을 병행합니다. 영국 출판사 펭귄 북스 아트 디렉터로 일하고, 글자체 사봉(Sabon)을 디자인한 것도 이 후반기의 일입니다.
많은 이들은 얀 치홀트의 대표적인 경력으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와 함께 영국 출판사 펭귄 북스 아트 디렉터 시절을 꼽습니다. 얀 치홀트는 그가 디자인한 독일 출판사 비르크호이저의 책들을 인상 깊게 본 영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올리버 사이먼의 추천으로 1947년부터 1949년까지 펭귄 북스에서 일하게 됩니다.
일찍이 문고본의 혁명을 불 지핀 펭귄 북스는 그가 실천해온 ‘능동적 도서’를 실천할 만한 곳이었죠. 네 쪽짜리 「펭귄 조판 규정」을 만들어 기존 펭귄 북스 책들의 크기, 글자체, 여백 너비 등을 다듬었고, 이에 따라 책 500여 권을 다시 디자인했습니다. 그가 펭귄 북스에서 근무한 기간은 3년 남짓이고, 오늘날까지 여러 아트 디렉터가 그 자리를 거쳤지만, 그가 세운 규칙들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독자께서 컴퓨터 운영체제로 (별다른 설정 없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를 사용하신다면 이 편지는 맑은 고딕으로, 애플의 MacOS를 사용하신다면 애플 산돌 고딕 네오로 보일 겁니다. 얀 치홀트는 프랑스의 활자 장인 자크 사봉의 이름을 딴 사봉을 비롯해 트란지토, 사스키아, 제우스, 사진식자 회사인 우헤르타입을 위한 글자체 등 10여 가지 글자체를 디자인했습니다. 이 가운데 사봉은 평생을 걸친 그의 연구와 실무 경험이 바탕이 된 대표적인 세리프체로 시대에 따라 그 시대의 기술로 판올림되며 『워시번 칼리지 성경』 같은 인쇄물뿐 아니라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공식 로고 등에도 사용됐습니다. 최근 사봉은 ‘사봉 이텍스트’(Sabon eText)라는 이름의 모니터 화면용 글자체로 거듭났죠.
이런 얀 치홀트가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된 것은 1991년 출간된 『얀 치홀트의 타이포그라픽 디자인』(안상수 옮김, 안그라픽스)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책은 얀 치홀트가 쓴 『타이포그래피 디자인』(Typografische Gestaltung)의 영어판 『비대칭 타이포그래피』(Asymmetry Typography)를 한국어로 옮긴 거였죠. 당시 저는 예능원에 다니며 마림바나 두드리던 꼬마에 불과했기에 그 책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혔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책의 별명이 ‘노랑 책’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 까닭이 노랑 바탕의 표지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책은 그렇게 소박하고 살가운 별명으로 불리며 편집 디자이너, 편집자 등의 참고서로 활용됐습니다. 그 뒤로 여러 출판사에서 얀 치홀트를 다룬 책이 출간됐죠.
이 책 『능동적 도서』는 영국 하이픈 프레스에서 2008년 출간한 『Active literature: Jan Tschichold and New Typography』의 한국어판입니다. 이 책을 비롯해 이전 책들은 얀 치홀트라는 인물과 그의 정신을 다룹니다. 그 책들과 『능동적 도서』의 차이점이라면, 이 책은 얀 치홀트에 입혀진 일부의 환상 또는 신비를 걷어내 그를 다시 조명하며 오늘날로 소환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능동적 도서』는 얀 치홀트가 상대적으로 평온했던 스위스 생활 이전, 다시 말해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를 정리하던 시절에 주목합니다. 지은이는 얀 치홀트의 생각을 좇으려 그의 글, 예술가들과 주고받은 편지, 교정쇄 등을 성실하게 책에 모았습니다. 그 덕에 이제는 너무 많이 인용되고 반복돼 공허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타이포그래피 혁명가’가 아니라, 고민하는 인간으로서 얀 치홀트의 면모가 도드라집니다.
인쇄 분야에서 창조적으로 활동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의 지적 토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겉모습만 모방하는 것은 옛날보다 나을 게 없는 새로운 형식주의일 뿐이다. —79쪽
우리가 근본적으로 바라는 것은 구조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 순전히 지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의견으로는 새로운 타이포그래피가 고전적 타이포그래피가 지니고 있던 내용과 기술, 형태 사이의 조화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현재 우리 본성의 지적인 표현에 완전히 적대적인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정신적 경향은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만의, 그와 유사한 적절한 표현에 도달할 것입니다. —88쪽
지은이가 이 책에서 보여준 성실함은 때로 그가 ‘성실함의 미로’에 빠진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치가 얀 치홀트를 체포할 무렵 SA 대원들이 얀 치홀트의 집에 걸린 피트 몬드리안의 작품을 금고로 착각한 일화는 소개될 수 없었겠죠.
SA 대원은 벽에 걸린 몬드리안의 그림을 보고 금고 문으로 착각했어요. 저보고 빨리 금고를 열라고 요구했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죠. 그러고는 말했죠. 이건 그림일 뿐이에요. 우린 금고가 없다고요. —151쪽
『능동적 도서』의 또 다른 미덕은 인간 얀 치홀트뿐 아니라 책과 독자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펭귄 북스 아트 디렉터 시절 얀 치홀트는 조판공이 타자 수에 따라 임금을 받는다는 이유로, 조판의 질보다 양을 중시한다고 생각해, 조판실을 돌아다니며 조판공들이 자신이 만든 규정에 따라 작업하는지 일일이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불만을 말하면, 부러 독일어 억양을 쓰며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척했죠.
그가 평생을 걸쳐 겨눠온 것은 잘못 사용된 타이포그래피라기보다는 독자를 존중하지 않는 무신경하고 무책임한 타이포그래피였습니다. 그가 행한 실천의 소실점에는 독자가 있었죠. 그런 점에서 얀 치홀트의 다음 전언은 독자를 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개인화가 아닌 표준화, 비싼 한정판이 아닌 값싼 대중판, 수동적 가죽 장정이 아닌 능동적 도서.
독자께서는 아시는지요? 영어로 된 글을 한국어로 옮기면 적게는 1.2배에서 많게는 1.5배까지 분량이 늘어납니다. 게다가 일반적인 본문용 한글 글자체는 그 특성상 조판할 때 본문용 영문 글자체보다 글줄 사이를 좀 더 넓게 조정해야 읽는 데 무리가 없죠. 게다가 이 책은 원서보다 판형이 약간 작아지면서 결과적으로 두께가 제법 두꺼워졌습니다. 원서와 달리 본문과 도판을 분리한 점도 이에 한몫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능동적 도서』는 매끄러운 번역, 노련한 편집과 솜씨 좋은 디자인 덕에 명쾌한 독서 경험을 제공합니다. 한편, 옮긴이의 일러두기는 원서의 편집자 로빈 킨로스의 서문과 더불어 독자를 그 뒤에 이어질 본문으로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특히 옮긴이는 한국에서 다양하게 번역돼온 타이포그래피 용어를 오늘날에 맞게 표준화하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 타이포그라피’는 ‘새로운 타이포그래피’가, ‘타이포그래피 소식’이나 ‘타이포그래피 보고’는 ‘튀포그라피셰 미타일룽겐’이 됐고요.
부록으로 수록된 질 좋은 도판과 덧붙여진 성실한 설명 역시 이 책에서 눈여겨볼 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흑백 또는 색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상태로만 봐오던 얀 치홀트의 작업물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시하지 못할 즐거움입니다. 다만, 본문에서 언급한 도판이 있는 쪽수를 해당 본문 옆에서 안내한 것처럼 도판 쪽에서 해당 도판을 언급하는 본문의 쪽수를 안내했더라면 어땠을까 합니다. 책을 읽다가 먼저 도판부터 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 도판과 관련된 내용이 본문 어디에 있는지 찾을 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어판 편집자나 디자이너가 본문과 도판을 함께 배치한 원서 구조를 택하지 않은 점 역시 궁금함으로 남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타이포그래피의 태도가 성숙한 것은 18세기 초 유럽에서였습니다. 반면 한국에서 타이포그래피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30년 남짓으로, 타이포그래피의 전체 역사와 비교하면 무척 짧습니다. 그럼에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타이포그래피 작품 가운데 한국인 것이 드물지 않고, 2008년 관련 학회가 설립돼 타이포그래피 전문가들의 연구를 장려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타이포그래피 그 자체에서 한발 나아가 그것이 지닌 문학성을 탐구하고 실험하는 대규모 전시가 열려 3만 명에 이르는 관람객이 다녀가기도 했죠.
이런 움직임의 바탕 어딘가에 얀 치홀트가 있음에도, 한국에서 그는 여전히 ‘타이포그래피 혁명가’ ‘타이포그래피의 거장’ 등으로만 불리며 그가 소개된 당시에만 머물러왔습니다. 이 책 『능동적 도서』의 시도에도, 제게 얀 치홀트는 아직 과거의 인물로 여겨집니다. 무엇보다 제 둔함 때문이겠지만, 한국에서 얀 치홀트가 놓인 환경 또한 무시할 수 없겠죠. 이 책의 부록에서 『근원적 타이포그래피』, 『서적 ‘예술’?』 등 각주에서만 봐오던 얀 치홀트의 저작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해도,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된 그의 저작은 ‘노랑 책’ 한 권에 불과하며, 지금은 이마저도 절판된 상태입니다.
다시 얀 치홀트를 새롭게 다룬 책이 출간된 것은, 한국의 타이포그래피를 둘러싼 환경에서 건강한 움직임이 있다는 증거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삼은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좀 더 풍성한 얀 치홀트의 저작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조만간 ‘노랑 책’이 다시 출간된다는 소식은 제게 『능동적 도서』의 출간 소식만큼이나 반갑습니다. 그 책이 여전히 ‘노랑 책’의 모습일지는 알 수 없지만, ‘하양 책’으로 불릴지 모를 이 책과 함께 참조해 읽는다면, 제가 느낀 아쉬움은 당분간 어느 정도 덜 수 있겠습니다. 두 책이 함께 놓인 모습 역시 제법 그럴듯할 테고요.
이 편지글을 쓰는 사이 또 한 곳의 중견 출판사가 사라졌습니다. 전자책이 등장하고, 출판계 바깥에서 독립 출판 등 출판계를 자극하는 의미 있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지만, 언젠가부터 출판 산업은 언제나 불황입니다. 여러 전문가가 진단을 내려왔지만, 말 그대로 진단에 그칠 뿐, 결국 ‘병’을 고칠 이는 둘일 겁니다. 능동적으로 도서를 출간하는 출판사와 그것을 능동적으로 읽는 독자 말입니다.
참, 독자께서 독일어 전문가시라면, 마지막으로 여쭙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편지글을 이런 질문으로 마무리하게 돼 다시 한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Jan Tschichold’를 한국어로 표기할 때 적절한 것은, 독일어 표기법과 그동안의 관례에 따른 (그래서 이 편지글에서도 그랬듯) ‘얀 치홀트’일까요,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원어의 발음에 어느 정도 충실한 ‘얀 치횰트’ 또는 ‘얀 치숄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