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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질서, 디스코드 서버 개설해

목록과 순서

베르사유 미궁의 분수 목록

말이든 글이든 처음부터 사전적 정의를 들먹이는 것은 겸연쩍은 일이다. 사전에 기댈 수밖에 없는 지식의 한계와 표현의 빈곤함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까닭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이따금 그런 순서를 따라야 할 때가 있다. 특히 목록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비롯한 여러 사전과 위키에서는 다음과 같이 ‘목록’을 정의한다.

어떤 물품의 이름이나 책 제목 따위를 일정한 순서로 적은 것.
—『표준국어대사전』

품목과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한 것.
—『두피디아』

사람의 이름이나 물품의 이름, 책 제목, 목차, 점검 해야 할 항목 따위를 일정한 기준과 순서로 적어 알아보기 쉽도록 만든 것을 이르는 말.
—『위키백과』

같은 속성을 가진 항목의 모임이나 순서가 매겨진 항목의 모임.
—『나무위키』

목록의 표면적 성격을 드러내는 이 정의는 목록이 단순히 나열 이상의 것임을 간과한다. 사실 목록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구조화하는 근본적인 방식을 보여주는 은유이자 도구다.

목록은 순서에 따라 의미를 만들어낸다. DNA의 염기서열이 우리의 생물학적 정체성을 결정하듯 목록의 순서는 정보의 구조를 형성하고 그 정보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게 한다. 글자와 단어의 순서가 문장을, 문장의 순서가 글을 만들어내듯 목록은 정보가 새로운 질서를 갖추고 맥락을 형성하도록 돕는다. 이는 인간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누군가와의 첫 만남에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없듯,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당신 유머는 별로 재미없어요.”라고 말할 수 없듯 적절한 맥락과 순서를 무시한 말이나 행동은 때로 파국을 초래한다.

세계는 목록의 집합으로 이뤄져 있다. 메뉴판, 도서관 서가, 검색엔진의 검색 결과는 모두 목록이다. 목록은 우리가 정보를 찾고, 선택하고, 사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시에 목록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특정 기준으로 정보를 배열하며 우리는 어떤 항목이 중요한지, 어떤 맥락이 필요한지 결정한다. 이는 목록이 우리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장치임을 보여준다.

목록은 위계적 구조를 지닌다. 어떤 목록은 더 큰 목록의 일부이며, 각 항목은 다른 목록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예컨대 ‘과일’이라는 목록은 수박, 멜론, 복숭아, 무화과, 체리 등으로 이뤄진 동시에 ‘식품’이라는 목록의 항목으로 포함된다. 이처럼 목록은 다층적으로 얽혀 있으며, 서로 다른 정보의 구조를 연결하고 통합한다. 이처럼 목록이 정보를 조직하는 방식은 복잡하고 정교하다.

목록은 완강한 동시에 유연하다. 목록은 순서를 통해 권위를 부여하지만, 동시에 변화를 받아들인다. 항목의 추가, 삭제, 재배열은 목록 자체를 변화시키며 새로운 맥락을 만든다. 따라서 목록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정보를 재구성하는 유기체다. 이 완강함과 유연함의 공존은 목록이 지닌 권력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2009년 국제 도서관 협회 연맹에서는 『국제 목록 원칙 규범』을 승인했다. 스무 쪽이 채 되지 않는 이 규범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2조 ‘일반 원칙’이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가 서지 정보를 정리할 때 적용하는 이 원칙은 사용자가 쉽고 빠르게 정보에 접근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목록의 목표를 목록으로 제시한다.

  1. 사용자의 편의: 기술을 작성하고 접근하는 데 필요한 이름의 제어 형식을 결정할 때 사용자를 염두에 둬야 한다.
  2. 관용성: 기술과 접근에 사용된 어휘는 사용자 대다수가 사용하는 어휘와 일치해야 한다.
  3. 표현성: 기술에서의 개체나 이름의 제어 형식은 개체 자체를 묘사하는 방식에 기초해야 한다.
  4. 정확성: 기술 대상인 개체는 충실하게 표현해야 한다.
  5. 충분성과 필요성: 이용자의 과업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하고 개체를 고유하게 식별하는 데 필수적인 기술의 데이터 요소와 접근을 위한 이름의 제어 형식 데이터 요소만 포함해야 한다.
  6. 중요성: 데이터 요소는 서지적으로 중요해야 한다.
  7. 경제성: 목표를 달성할 또 다른 방법이 있을 때 전반적으로 가장 경제적인 방법을 우선해야 한다. 즉, 최소 비용이나 가장 단순한 접근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8. 일관성과 표준화: 기술과 접근점은 되도록 표준화해 작성해야 한다. 이를 통해 더욱 높은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고, 이는 곧 서지 데이터와 전거(典據) 데이터의 공유 가능성을 높인다.
  9. 통합성: 모든 유형의 자료에 대한 기술을 비롯해 모든 유형의 개체에 대한 이름의 제어 형식은, 적합하다면, 일련의 공통된 규칙에 기초해야 한다.

도서관학의 근간을 이루는 이 아홉 가지 원칙은 다소 낯설고 기술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이어질 수많은 목록을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암시하는 나침반이다. 즉, 좋은 목록이란 ‘사용자의 편의’, ‘경제성’, ‘일관성’ 등을 고려하는, 명확한 목적을 가진 설계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범 답안인 셈이다. 게다가 이 또한 엄연히 목록이다.

이것은 목록이다. 인명과 전화번호로 이뤄진 항목이 특정 지배 논리, 즉 가다나순에 따라 수직으로 배열돼 있다. 만일 항목에서 인명과 전화번호의 순서가 뒤바뀐다면, 목록의 지배 논리 또한 가나다순에서 번호순(오름차순)으로 바뀌는 편이 이롭다. 이렇듯 목록의 구조와 배열 방식은 정보의 성격과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최적화될 수 있으며, 이는 목록이 나열을 넘어 의미 있는 정보의 체계임을 시사한다.

이것은 목록이다. 음식명과 가격으로 이뤄진 항목이 특정 지배 논리, 즉 가격순에 따라 수직으로 배열돼 있다. 경우에 따라 음식을 촬영한 사진이나 음식을 재현한 그래픽이 항목을 보조하거나 성격이 비슷한 항목을 묶어 또 다른 목록을 만든다. 지배 논리는 가격순 외에도 인기도순, 계절순, 또는 요리사의 추천순 등이 적용될 수 있다. 글자와 숫자라는 항목의 형식은 앞의 목록과 같지만, 맥락에 따라 지배 논리, 즉 순서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은 목록이다. 버스가 5분을 넘기지 않고 정차하는 정류장의 이름으로 이뤄진 항목이 특정 지배 논리, 즉 거리순에 따라 배열돼 있다. 만일 신도시가 개발돼 사이사이 정류장이 신설된다면, 기존 항목 사이에 새로운 항목이 끼어들 수 있지만, 목록의 지배 논리에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것은 목록이다. 작가명, 출생 연도, 작품 제목, 제작 연도, 제작 방법, 부가 정보가 각각 항목으로서 중요도에 따라 수직으로 배열돼 있다. 만일 작가가 둘 이상이라면, 작가명에 해당하는 항목은 다시 목록으로서 작가명을 나열하고, 나머지 항목 또한 목록으로 거듭날 희망을 품는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신제품 「(웃음)」은 제목 그대로 ‘(웃음)’을 담은 다목적 포스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의회의 속기사들이 처음 고안했다는 ‘(웃음)’[(笑)]은 오늘날 대담이나 인터뷰 등의 기록에서 발언자나 주위의 반응을 간단히 묘사하는 데, 또는 지나치게 진지한 말을 눅이는 데, 또는 말의 의미를 역전시키는 데 쓰이곤 한다. 이뿐일까. 더러 특정 문화에 심취한 이는 이를 통해 자신의 자폐성을 넌지시 드러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웃음)’의 양상은 앞뒤 맥락에 따라 폭소나 미소, 조소나 냉소 등으로 달라진다. (…) 「(웃음)」은 ‘(웃음)’의 역할을 자임한다. 우아하게 디자인된 최정호체의 소괄호 속 ‘웃음’이 어떤 이에게는 시답잖은 헛웃음에 불과하더라도 아무러면 어떤가. “웃으면 복이 온다.”라는 옛말이 과학적으로까지 증명된 마당에. (웃음)

이것은 목록이다. 문장으로 이뤄진 항목이 수평으로 배열돼 있다. 항목은 마침표와 공백으로 구분된다. 목록은 작성자의 인식을 지배 논리로 삼는 터라 군데군데 불안함이 스미고 이따금 위태롭다. 하지만 누구도 이것이 목록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항목은 다시 구절로 이뤄진 항목의 목록이고, 각 목록은 항목이자 또다시 단어로 이뤄진 항목의 목록이고, 각 목록은 항목이자 또다시 글자로 이뤄진 항목의 목록이다.

따라서 이것 또한 목록이다. 한 회사에서 수행하지 않는 일을 밝힌 문장으로 이뤄진 항목이 알파벳순과 가나다순에 따라 수직으로 따라 배열돼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항목은 다시 목록의 형태를 띤다. 목적어, 동사의 어간, 연결 어미로 이뤄진 항목이 또 다른 항목인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과 “않습니다.” 사이에 자리 잡는다.

이것은 목록이다.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제라르 주네트(Gérard Genette)의 이론을 빌리면 본문과 파라텍스트로 이뤄진 항목이 3차원상에서 z축을 기준으로 배열돼 있다. 본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항목이자 제목과 문단의 목록이며, 파라텍스트 또한 하나의 목록이자 다시 목록으로서 페리텍스트와 에피텍스트를 항목으로 품는다. 목록의 물리적 형태와 맞닿은 페리텍스트는 표지, 제목, 서문, 목차, 주석 등을, 목록 밖에 존재하는 에피텍스트는 작가 인터뷰, 서평, 광고 등을 다시 항목으로 품는다. 하지만 이렇게 다층적인 항목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복합체로서의 목록도 서가에 놓인다면 그저 서가라는 목록의 항목에 불과하다.

이것은 목록이다. 작품과 전시장이라는 공간, 그리고 관람객의 경험이 복잡하게 얽힌 항목의 집합체다. 큐레이터의 의도는 이 목록의 숨은 알고리즘으로서 작품을 배열하고, 동선을 설계하며, 관람의 리듬을 결정한다. 각 작품은 그 자체로 독립된 세계이자 목록의 한 항목이며, 벽면의 레이블과 도록의 설명은 이 항목에 달린 주석이다. 관람객의 시선은 목록을 훑으며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움직이며 의미를 구축한다. 티켓 한 장으로 시작된 이 목록은 기념품으로 마무리되곤 하지만, 그 또한 또 다른 목록을 추동하는 시작이 된다.

이것은 목록이다. 보이지 않는 상자로 이뤄진 항목이 중요도와 시각적 흐름에 따라 수직 또는 수평으로 배열돼 있다. 각 항목은 마트료시카처럼 다시 상자로 이뤄진 항목의 목록이고, 각 목록은 항목이자 또다시 상자로 이뤄진 목록이다. 이는 항목이 더는 나뉘지 않을 때까지, 즉 목록이 성립할 수 없을 때까지 반복된다.

이것은 목록이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상자로 이뤄진 항목이 중요도와 시각적 흐름에 따라 수직 또는 수평으로 배열돼 있다. 각 항목은 마트료시카처럼 다시 상자로 이뤄진 항목의 목록이고, 각 목록은 항목이자 또다시 상자로 이뤄진 목록이다. 이는 항목이 더는 나뉘지 않을 때까지, 즉 목록이 성립할 수 없을 때까지 반복된다.

이제 우리는 웹사이트를 만드는 일뿐 아니라 거의 모든 창작 행위가 결국 어떤 항목을, 어떤 지배 논리(순서)에 따라 배열할지 결정하는, 목록을 설계하는 문제임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는 단어의 목록을, 디자인은 요소의 목록을, 큐레이팅은 작품의 목록을, 그리고 웹사이트를 만드는 일은 이 모든 것의 목록을 다루는 일이다. 창작이란 결국 세계의 파편을 자신만의 순서로 다시 엮어내는 목록 만들기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것은 목록일까? 등받이, 좌석, 다리가 특정 기능과 미학에 따라 수직으로 배열된 항목의? 나무, 금속, 천으로 이뤄진 재료의? 나사, 못, 접착제로 이어진? 그리고 이것이 놓인 공간은 또 하나의 더 큰 목록일까?

이것은? 어떤 항목이 어떤 지배 논리에 따라 어떻게 배열돼 있을까? 과육, 씨앗, 꼭지의 순서로? 맛, 색, 질감의 나열로? 목록이 품은 항목은 다시 목록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그리고 더는 나뉘지 않는 마지막 항목은 과연 어떤 향기를 풍길까? 레인보 셔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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